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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믿는 믿음, 보지 않고 믿는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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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6 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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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보고 믿는 믿음보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아니 더 크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 이 말씀은 언제나 이런 의견에 대한 분명한 대답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의 시각적인 감각에 대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로 쓰인 것일까?
사실, 우리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다. 우리는 믿으려는 것만 본다는 누구의 말처럼 감각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이성의 도구이며 수단일 경우가 참 많다. 믿는 것을 그대로 필터링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보는 것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럼 보지도 못한 것을 믿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일까?
그럼, 그렇다고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전혀 믿지 않는가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얼마나 웃기는 존재인지 모른다. 귀신을 본 사람은 정말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귀신이 있다고 거의 누구나가 믿는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공기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보지 못했다. 그 중에 산소라는 알갱이가 어떤 모습인지 전혀 못봤다.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무공해 채소가 정말 무공해 채소인지 눈으로 확인 못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내가 감기가 걸리거나 혹은 몸살이 걸렸을 때, 의사가 진찰하는 것, 그리고 의사가 말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도 본 바가 없다. 어떤 물질이 내 몸에 들어온 것인지, 어떤 물질이 약을 통해서 나에게 들어올 것인지 나는 정확하게 눈으로 본 바가 없다. 그저 믿고 받아먹을 뿐이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믿지 못한다. 하나님이 귀신보다도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존재여서 그런건지, 아니면 귀신만큼도 가까이 있는 존재가 아니어서 그런건지는 잘 모르겠다. 혹은 의사나 장사꾼들만큼도 믿기 어려운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하기사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기 어렵다고 예부터 이야기한 것을 보면 지금 우리 시대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어쨌거나 그렇다고 해도, 말만 할 때는 꼭 봐야만, 혹은 꼭 느껴야지만 믿을 것처럼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 우리가 믿는 것들을 바라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쉽게 확인해볼 수 있다. 그러면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이 틀린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보았기 때문만이 아니고, 보지 못하고 믿는 것도 가능하니까.
그럼 왜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셨을까? 우리의 이런 이중적인, 혹은 일관되지 못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야기를 하셨을까? 우리의 덜 성숙한, 혹은 완전하지 못한 모습에 대해서 일침을 놓기 위해서 이야기하셨을까? 그건 아닐꺼다. 내가 아는 예수님은 절대 그런 분은 아니다. 우리의 약함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시거나 민망히 여기시는 분이지 그걸 가지고 이래저래 이야기하시는 분은 절대 아니다. 그렇게 사람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즐겨하시거나 좋아하실 분도 아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그런 우리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하신 것일까?
이 말씀이 나온 부분을 조심스레 살펴보면, 보고서 믿은 사람은 단지 도마만이 아니다. 저번에 설교 때에도 이야기했지만, 도마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다. 마리아나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그 외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했을 때에도 믿지 못했다. 사실, 베드로나 요한도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니었고, 그들도 무덤을 내려갈 때 성경은 그들이 믿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결국 보지 못하고 믿은 자는 없었다. 성경에 전혀 없었다. 예수님의 부활 때는 분명히 없었다. 그럼 결국 예수님의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라는 말씀은 단지 도마를 향한 말씀은 아니라는거다. 지금 이 말씀을 들었던 모든 제자들은 다 “복된” 자들의 반열에는 오를 수 없는 자들이 되어버린거다.
왜 그랬을까? 왜 그들은 믿지 못했을까? 첫 번째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예수님은 아직 전적인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한 인간으로 비춰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눈에 보이는 동안은 따를만한 사람이고, 힘이 있어보일 때에는 함께 있을만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죽음이라는 한계선을 넘어선 후에는 제자들의 기억속에 절대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버렸는지 모른다. 죽고나니 그가 했던 모든 말들과 모든 이적들은 단지 그 때 뿐이고, 한낮 기억이나 추억으로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는지 모른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그 어느 누구도 그렇게 죽었다가 다시 살지는 못했다. 다른 이들은 살렸지만, 그건 그가 목숨이 붙어 있어 능력이 있어보일 때 아니었는가. 그 자신이 죽었으니 그 능력이 어디서 나타나겠는가. 논리적으로 너무 타당한 말이다. 우리 눈에는. 어쨌거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만큼도 신뢰받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이미 죽음에 대해 예고했지만, 믿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이다.
이건 사실,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우리가 언제 성경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 적이 있는가? 정말 하나님의 절대 진리로 보고, 또 그렇게 믿고 있는가? 나 자신에게 질문한다면, 정말 부끄럽지만, 대답할 자신이 없다. 그 말씀대로 된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가슴 속에서부터 울려오는 목소리로 외칠 자신이 없다. 의심이 들고, 회의가 들고, 그러면서 믿지 못하는게 솔직한 나의 모습이다. 문자적으로 되어지기 보다는 어떤 비유나 은유가 아닐까 생각하고, 내가 아는 어떤 다른 모습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라고 돌려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얼마나 많이 이야기하면서도 그대로 사는 것, 그대로 살 때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나.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까지 다 알고 있는 나도 그런데, 하물며 제자들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러고 보면 정말 하나님에 대한,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갖는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겠다. 그게 정말 가능하기는 한 일인지도 모르겠고.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말하는 이 “본다”는 의미는 자신의 지각, 이성이라는 울타리를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단지 본다는 것만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우리의 오감, 그리고 그것으로 구축되는 우리의 지각, 지성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즉, 우리의 이성을 넘어선, 우리의 지식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게 믿음이라는 의미는 아닐까? 내 이성으로, 내 생각으로 이해되어지고, 받아들여지는 것만 믿는다면, 뭐 그것도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건 믿음이라기보다는 확증이 아닐까? 어차피 지금 글에서 보자면 그 “확증”이라는 말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는 말이지만, 그건 차후로 미루어 두고.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성이나 가치관, 혹은 경험에 의거한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에 믿을 수 있는 그런 자리를 원하신 것은 아닐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성의 방벽을 무너뜨리고 그것에 안주하지 않는 신앙, 하나님이 하신다는 일에 대해서, 하실 것이라는 일에 대해서 비전을 가지고 덤빌 수 있는 그런 신앙인이 되라는 말씀은 아닐까?
그럼 나의 이성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나에게 물으신다면 어느 시인의 말처럼 “웃지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걸 알면 내가 이런 믿음에 머물러 있겠나. 나도 답은 없다. 답이 없으니 찾아보는 거고.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고, 하나님을 따른다고 말은 하면서 그 믿는게, 따르는게 뭔지 고민도 안해보고 사는 것이 과연 맞는지를 되짚어보고 싶을 뿐이다. 혹시 또 아는가, 이렇게 고민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다보면 다니엘에게 보내셨던 천사를 나한테도 보내주실지. 그래서 내가 모르던 것을 또 깨닫게 해 주실지.
신앙이라는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오묘하다. 그리고 기묘하다. 이해도 안되고, 믿기도 어렵다. 그런데 그걸 믿고, 그걸 붙잡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의 꼬리를 붙잡고 돌아다니다 느끼는 것은 어쩌면 이미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사는지도 모른다는거다. 어차피 이해 못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아니, 나름대로는 이해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믿음은 신비다. 그 믿음이 내 속에서 꿈틀거리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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